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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뒤피 더현대서울 전시 리뷰(feat.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

by shstory 2023. 9. 25.

 

  • 기간: 2023. 5. 17 ~ 2023. 9. 6
  • 장소: 더현대서울 6층 ALT.1
  • 관람료: 성인 20,000/ 청소년 15,000/ 미취학 13,000
  • 관람시간: 월-목 10:30~20:00/ 금-일 10:30~20:30

 

6월에 다녀온 전시 리뷰를 이제서야 포스팅합니다. 미뤄두었던 전시 리뷰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어요. 라울 뒤피의 전시는 더현대서울과 예술의 전당에서 동시에 진행했었는데요. 저는 더현대서울에서 전시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라울 뒤피에서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뒤피는 야수파, 인상주의, 입체주의 등 20세기 초의 굵직굵직한 미술사조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견고하게 만들어나갔고 특히 경쾌한 생감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라울 뒤피에 관한 정보를 여기저기 찾아보던 중에 이소영 작가의 라울 뒤피에 관한 책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뒤피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책 또한 표지부터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어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도판이 많아서 전시에서 보지 못한 작품들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혹시 뒤피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으신 분들, 다양한 작품을 보고 싶은 분들은 책 추천드립니다^^

 

라울 뒤피는 미술을 공부하면서 스치듯 이름만 들어보았던 작가였습니다. 화려한 색채로 상류층의 쾌락적인 삶을 주로 다루었다는 정도로 가볍에 여겨졌던 작가였는데 전시를 보고 나니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궁금해졌습니다. 

 

뒤피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주의에 차례로 영향을 받은 이후 밝고 장식적인 색채와 스케치하듯 빠른 필치로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 삽화, 직물, 도예, 연극의 무대 장식, 실내 장식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 도시인 르아브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던 그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교회 성가대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족들은 전반적으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세 때 거피 수입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야간에는 르아브르 시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바닷가 풍경은 나고 자란 그의 고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르아브르는 많은 화가들이 그림 소재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뒤피에서 르아브르의 한적한 바다 풍경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배들로 북적이는 풍경은 수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1900년, 시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레옹 보나의 화실에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초창기 그의 작품에서는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1907년경에는 인상주의의 불연속적인 색채 표현을 버리고, 야수주의의 강렬한 색조를 추구했습니다. 1905년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마티스의 작품 <사치, 평온, 쾌락>을 보고 야수파 화풍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야수파는 거칠고 자유로운 필치와 색감을 드러내며 자유롭고 활기찬 것이 특징으로 대담한 화면을 연출합니다. 뒤피는 야수파 화가들의 대범한 화풍에 영향을 받아 색채와 선묘를 통해 경쾌한 에너지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908년부터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오랜 친구였던 브라크와 함께 에스타크를 여행하며 세잔 풍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으며 공감의 새로운 구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잔이 즐겨 사용하던 파사주 기법을 활용하며 형태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서는 독일 표현주의와 뮌헨의 장식 미술을 보고 활동을 확장하여 1910년 패션 디자이너 폴 푸아레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수없이 많은 직물을 디자인했습니다. 회화작품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그는 판화, 텍스타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쓴 '동물 시집'의 삽화를 목판화로 그리는 시도를 하며 푸아레의 제안으로 목판화의 모티브들을 직물로 바꾸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직물 디자인까지 확장하게 되었는데요. 이 삽화에 쓰인 장식적 요소들을 작품에 프린트하거나, 도자기, 태피스트리에 재사용하여 판화를 직물 날염 기법으로 응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습니다. 

 

뒤피의 스타일은 세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물감의 투명한 사용과 겹침효과가 첫 번째입니다. 그는 수채화, 유화에서 모두 가능한 투명성과 겹침효과를 그림에서 드러내며 맑은 느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춤추는 듯한 서예적 필치입니다. 중국 서예에서 영감을 받아 대담한 선묘와 리듬감 있는 드로잉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색면과 선의 분리입니다. 색면과 선을 분리시켜 스케치 선에 맞게 채색하지 않았으며 드로잉 선과 색채를 비대칭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장점들이 당대 화가들보다 독창적이면서도 자유로움 잃지 않은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1925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장식품과 도자기를 전시했는데 그의 작품은 이후 아르데코 양식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 또다시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뒤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이던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를 출품했습니다.  이 작품이 <전기 요정>으로 뒤피의 대표작입니다.

전기 요정
전기 요정

이 작품은 1937년 파리 전력 공급회사의 요청으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1937년 만국 박람회의 뤼미에르 파빌리온 벽면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전력 공사 건물 외벽에 전기의 중요성과 전기가 인류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알리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곡선의 벽에 250개의 패널로 채워져 있고 높이는 10m, 길이는 60m에 이릅니다. 인류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을 기획했습니다. 또한 전기 발전에 기여한 111명의 과학자들과 사상자들을 벽화에 그려 넣어 거대한 작품 앞에서 어떤 인물들이 그려 넣어졌는지 한 명 한 명 찾아보는 것도 작품감상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숲속의 말을 탄 사람들>은 영국의 로열 더치 석유회사의 소유주인 장 바티스트 아우구스트 케슬러의 가족 초상화입니다. 가족들이 우거진 숲에서 단체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의뢰받은 뒤피는 여러 드로잉과 습작, 수채화를 그렸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초상화를 완성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그의 장점을 살려 자유로운 드로잉선과 색채로 이루어진 인물들로 표현했습니다. 

숲속의 말을 탄 사람들

그는 말년에 만성적인 다발성 관절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열심히 작업했습니다. 이후 1953년 남프랑스의 포르칼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품을 볼수록 경쾌함과 사랑스러움을 가득담은 그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즐거운과 행복함을 선사해 줍니다.

 

"나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추한 것을 지우도록 되어 있다." 

- 라울 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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