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출발에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은 1839년 엑상 프로방스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861년 파리에 온 세잔은 아카데미 쉬스에서 카미유 피사로와 아르망 기요맹을 만났으며 모네, 바지유, 시슬레,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친구인 문학가 에밀 졸라를 통해 쿠르베와 마네를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자주 교류하게 되면서 인상주의에 가담하였고 초기의 폭력적이고 환상으로 가득했던 어둡고 거친 화풍들은 점차 가벼운 터치와 밝은 색채로 변화해 갔습니다. 세잔은 경계심이 많아 대인관계에 소극적이었으며 괴팍할 만큼 예민한 성격이었기에 주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세잔은 1874년, 1977년 두 차례 인상주의 전시를 출품했으나 인상파 화풍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피사로를 스승으로 여기며 그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점차 찾아나갔습니다. 1886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고향 땅을 상속받은 그는 고향에 칩거하며 레스타크와 생 빅투아르산을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 생 빅투아르 산은 차츰 원근법과 사실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회화적 질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납작한 터치를 사용하여 면을 구사하고 붓터치를 겹치고 여러 방향으로 바꾸어가며 평면적인 화면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사물을 단순화하여 구, 원뿔, 원기둥을 추구하였습니다. 빛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형태에 주목했습니다. 정물은 인물이나 풍경처럼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정물화를 선호했습니다. 특히 사과를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을 만큼 다시점을 통해 구의 형태를 가진 사과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다시점이란 하나의 대상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잔은 다시점을 통해 그 대상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시점을 구사하여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성질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도록 표현했습니다. 대상에 내재된 본질과 질서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를 현대미술에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화가로 알려지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정물화만 그렸던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인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00번이 넘는 같은 자세를 요구하는 그의 까다로운 작업방식 때문에 모델을 서고 싶어 했던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세잔은 인물화를 통해 모델의 성격과 인품을 담아내기 위해 항상 고민했다고 합니다.
1895년에는 볼라르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이 크게 성공하면서 전위미술가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1899년, 1901년, 1902년에 살롱 데 쟁데팡당에 초대되었으며 살롱 도톤느에도 특별 전시되어 야수파 화가들에게 실험적인 미술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20세기 초,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의 회화는 물체를 고유의 기하학적인 단위로 탐색했다는 비평가 베르나르의 해석에 근거해 세잔을 자신의 선배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후 로저 프라이, 클라이브 벨, 모리스 드니와 같은 비평가들은 세잔을 추상미술을 탄생시킨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초창기 작품 '에벤망을 읽는 아버지'는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와 세잔의 심리적인 관계를 암시하며 그려졌으며 '납치'는 쿠르베의 영향이 잘 보이는 표현적인 화풍입니다. 1881년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건축적인 구조와 짧고 일정한 방향의 붓질이 잘 나타나며 점차적으로 대상의 윤곽선과 거리감이 완전히 해체되고 구조만 남는 세잔의 개성적인 화풍이 정립되었습니다. 특히 말년의 연작 '수욕도'는 고전적인 구성을 통해 그림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세잔의 노력이 담긴 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출발에 큰 역할을 한 세잔은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요 화법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대상의 본질을 표현함으로써 견고한 질서를 가진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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