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화와 같은 그림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파울 클레는 1879년 스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독일 출신의 음악교사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를 둔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기며 음악과 매우 밀접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때문에 음악적 재능 또한 뛰어났습니다.
7세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11세에는 베른 음악협회의 명예 회원이 될 정도로 바이올린 연주실력이 뛰어났습니다. 또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많았습니다.
음악을 전공한 부모님은 당연히 클레도 음악의 길을 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클레는 미술을 선택하여 1898년 19세가 되던 해에 독일로 떠나 미술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뮌헨 아카데미에 들어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슈투크는 해부학적 지식을 중요시하며 회화보다 소묘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요. 그의 이러한 방향은 클레와 맞지 않았기에 결국 아카데미를 떠나게 됩니다.
그의 예술인생에서의 큰 전환점은 바로 여행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인 헤르만 할러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요.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로마, 폼페이 등을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2년 뒤, 다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데요. 이 여행을 통해서 그의 작품에는 배나 고기가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클레는 피아니스트인 릴리 슈툼프와 결혼했고 결혼 후에도 붓을 놓지 않으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초창기 작업은 주로 판화였는데요. 어둡고 기괴한 분위기의 판화작업이나 소묘를 그렸으며 항상 음악과 함께하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1914년 그는 친구와 함께 튀니지와 카이루안을 여행했습니다. 그에게 영감을 준 두 번째 여행이 되었는데요. 이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선명한 색채가 드러나는 화풍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항상 색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던 클레는 특히 튀니지여행으로 색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색채가 풍부한 것은 여행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오르피즘의 화가였던 로베르 들로네의 회화에서 영향을 받아 색채에 리듬을 더하여 화폭에 음악적 리듬감을 더했습니다.

"미술이 대상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문학과 같은 세부 묘사로 머물면서 모방의 노예가 될 것이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유럽은 참혹한 전쟁 속에 얼어붙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트 마케, 프란츠 마르크 등 참전한 동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클레는 다행히도 운 좋게 비행기를 닦고 페인트 칠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여가시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1917년에는 아동화 같은 그려진 그의 독특한 화풍들이 점차 인정받게 되었고 1920년에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되어 바이마르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의 종합예술학교로서 건축을 중심으로 공예, 회화, 조각을 종합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세워졌습니다. 이곳에서 칸딘스키를 만나 교류하며 형태마이스터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37년에는 나치가 등장하며 퇴폐미술전을 열었습니다. 퇴폐미술전은 나치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에 대해 타락한 미술로 낙인을 찍는 행위였습니다. 특히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내세웠는데요 퇴폐미술전에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작품 제작을 금지했습니다. 칸딘스키와 클레의 작품도 퇴폐미술전에 전시되며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화가들은 큰 충격에 휩싸이며 일부 화가들은 미국을 망명했고 칸딘스키는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나치의 예술에 대한 탄압은 국립학교였던 바우하우스에도 영향을 주었고 바우하우스는 데사우시로 이전하며 시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56세에 클레는 기관지염에 걸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어 폐와 심장에 합병증까지 일어났는데요. 이 사실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았던 클레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회복되기 어려웠습니다.
1940년 클레는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쉬지 않고 작품에 전념했던 그는 무려 9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모든 작품이 제각각 다른 개성을 뿜어내고 있었고, 어느 하나의 화풍으로 규정지을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에 도전했습니다.

특히 음악, 문학, 미술 등 모든 예술을 사랑했던 그는 특별한 재능을 통해 이 모든 장르를 통합한 새로운 화풍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후 예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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