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폰스 무하
체코 출신의 포스터 디자이너, 삽화가, 장식미술가, 화가로서 실용미술과 순수미술을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예술가입니다. 선형의 장식적인 문양과 풍요로운 색감 및 젊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한 묘사는 아르누보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포스터, 장식품 같은 실용미술을 순수미술의 단계로 끌어올리며 근대 미술에 새로운 영역이 등장하고 발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1860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 중 하나였던 모라비아 지방 이반치체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라비아의 브르노에서 초기 교육을 받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무대 배경을 그리는 회사에 들어가 일한 뒤, 뮌헨과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1894년 연말 휴일을 앞둔 어느 날, 인쇄소에 당대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한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제작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우연히 이 일을 맡게 된 무명 작가 알폰스 무하는 이를 계기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스터의 성공으로 베르나르와 6년간 전속 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녀가 공연하는 연극의 포스터와 의상 및 무대 배경 등의 디자인을 모두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 달력, 일러스트, 상품광고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업하며 대중예술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1904년 그는 모든 명성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미국에서 후원자 찰스 크레인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시카고 실업가이자 친슬라브주의자인 크레인은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20점의 대형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후원하게 됩니다. 그의 지원으로 슬라브 민족의 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적극적인 답사를 통해 그는 20여 년에 걸쳐 대작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나치는 그의 장례식에 모이지 못하도록 제재했지만 체코 국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무하의 장례식은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참석할 정도로 애국자였던 무하를 향한 국민들의 마음은 대단했습니다.
- 아르누보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아르누보 시대로서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적인 양식입니다. 산업화된 현실을 외면하고 기능성을 추구했던 디자인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모티브를 찾으며 디자인에서 장식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아르누보하면 대표적으로 복잡하고 장식적인 곡선과 평면성을 강조한 디자인을 말합니다.
- 작품 스타일
그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장식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의 고향 이반치체는 비잔틴의 영향을 받았던 지역이었습니다. 비잔틴의 예술을 모자이크로도 유명한데요.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곳곳에는 모자이크 느낌을 더하여 비잔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성공으로 이끈 첫 작품 <지스몽다>(1894)는 약 2미터 높이의 폭이 좁고 세로로 긴 판형에 장식 문자와 풍요로운 색감으로 화려하게 디자인되어,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근대 포스터의 개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특히 '벨 에포크'의 뮤즈인 여배우를 아름답고 성스럽게 표현한 아르누보의 정수로 평가받았습니다.
1895-1900년 사이 무하는 포스터 작가들을 이끄는 인물이 되었고 그의 독특한 양식은 '무하 양식'으로 불리며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과 동의어로 간주되었습니다. 폭넓게 대중의 인지를 획득한 무하는 새로운 장르인 '장식패널'을 통해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장식 패널은 텍스트가 없는 포스터로 오늘날 예술 포스터의 원형이며 순수하게 그 예술적 가치를 감상하거나 실내 벽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쇄업자가 무하의 디자인을 수없이 다양한 판본으로 재활용하여 비즈니스 기회를 극대화하려고 고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기획은 아름다운 예술품의 창작을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무하의 신념과도 일치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일반 대중이 알맞은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로 진화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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